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문단 편집) == 평가 == 그의 적극적인 원주민 권익 옹호 활동으로 인해 중남미에서는 물론 스페인 내부에서도 대체로 평가가 좋은 인물이다. 라스카사스의 평판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태동한 19세기 이전 16, 17, 18세기에, 특히 라스카사스를 계승해 인권론과 국제법에 관심이 많았던 살라망카 학파를 중심으로 훌륭한 스페인의 지식인이자 교회의 아들로 좋게 평가한다. 라스카사스가 공부했던 살라망카, 성직자로 일했으며 토론에 참여했던 바야돌리드 등 스페인 각지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나 각종 지명들이 있다. 그러나 조국인 스페인에서는 비판도 좀 있다. 스페인에서도 메넨데스 피달 같은 일부 학자들, 자국 중심적 성향의 스페인인들은 라스카사스가 따지고보면 다른 유럽인들도 다를 바 없었던 짓을 유독 스페인만 잘못한 것처럼 매도했다며 비판적으로 보았다. 참고로 피달은 1869년생이고 1968년에 졸했으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사람이다. 심지어 라스카사스에 대한 비판은 말년인 1960년대에 했다. 이 때 [[미국]]에선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대표되는 [[흑인민권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때였다.[* 공교롭게도 킹 목사와 피달은 사망한 연도도 똑같다.] 이는 19세기 들어 스페인도 다른 유럽 국가처럼 이전보다 강경한 인종주의에 기반해 좀더 폐쇄적이고 노골적인 국익을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이 대두해 라몬 메넨데즈 피달을 비롯한 많은 [[자유주의]], 좌파 지식인들도 이러한 영향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 국가 이전의 16~17세기 근세(early modern)에는 아직 본격적인 생물학적 인종주의의 근간이 되는 유전학 같은 자연 과학적 토대도 없었고, 민족주의가 기껏해야 그 사상적 토대나 다져지는 시대였으니 종교적 정체성과 이해타산만 맞아 떨어졌으면 문화와 민족간의 차이가 의외로 상호간 교류에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부정적인 시각도 오히려 상당히 뒤늦은 근대와서 형성되었으며 지금은 그리 주장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일시적 평가였고, 오히려 본인이 살았던 16세기에서 라스카사스는 무슨 광야에서 혼자서 박해받으며 외로운 정의를 주장한 아웃사이더는 결코 아니었다. 라스카사스가 항변한 가톨릭적 반인종주의는 오히려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에선 [[안토니오 몬테시노스]]를 비롯한 도미니코회의 선배들이 이미 토대를 닦았고, 동시대에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같은 신학자, 법학자들이 이론적으로도 체계를 잡았으며 스페인 왕실이나 유럽 가톨릭 교회에선 더 주류에 가깝고 권력자들도 옹호했던 시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베리아 식민제국들의 신대륙 정복지에서 이루어진 학살과 학대는 결국 스페인 본토 안에서야 듣기좋은 소리 어이쿠 라스카사스 선생님하면서도 막상 이권이 걸려있는 아메리카 현지에 깊숙하게 개입할 능력이나 의지는 부족했던 전형적인 '''실천과 집행력의 문제에 따른 이중성'''과 어느정도는 불가항력인 신구대륙 미접촉 질병 문제[* 물론 '어느 정도 불가항력'이란 게 스페인, 포르투갈 현지 극우들 하는 소리처럼 이베리아 식민제국들의 악행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순 없다. 아무리 유럽발 질병들이 파괴적이었다 해도 전쟁과 착취, 전통 공동체 붕괴와 수많은 유랑민 초래로 인해 면역력이 형편없이 떨어져 그리 질병에 쉽게 픽픽 죽어나가는 환경을 조성한 건 전적으로 이베리아발 콩키스타도르들의 죄악이다] 같은 복합적인 요소가 크지, 스페인 본토에서 어쨌든 입으로나마 반성, 자숙하는 목소리가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미국]]의 노예제와 20세기까지의 [[짐크로우 법|흑백 강제 분리]], 유럽 대륙의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국가관, 인종관은 오히려 '''생물학적 차원에서 유색인종은 근본적으로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혔던 19세기, 20세기 초반에서나 조성될 수 있었다. 오히려 라스카사스가 활동했던 시절의 세풀베다가 보여준 강경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은 사실 당대로도 다수 의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달 본인으로 두고 말하자면 이런 강한 내셔널리즘, 스페인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긴 했지만 19세기 스페인 자유주의 정치판에서부터 [[미서전쟁]], [[보르본 왕조]] 몰락, [[스페인 제2공화국|제2공화국]] 탄생, [[스페인 내전]], [[프랑코 정권|프랑코 독재 정권]]까지 격동의 스페인 근현대사 온갖 못볼 꼴을 다보며, 나름 당시 스페인, 특히 노년의 [[프란시스코 프랑코|프랑코]] 정권의 악독한 정치적 탄압에 맞서 왕립 [[스페인어]] 학회 의장이라는 학자로서 최고로 명예로운 자리도 갖다 버리고, 클라우디오 산체스-알보르노즈, 아메리코 카스트로 같은 해외에 망명 나가있는 동료 학자들도 도와주곤 했던, 자기 시대에서는 양심과 문제 의식을 포기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 메넨데스 피달이 살았던 시대 자체가 스페인인들 입장에선 좀 비관적으로 보면 18세기 이후 끊임 없이 몰락해가는 자국의 쇠퇴사에서도 제국 완전 해체, 가난, 내전, 독재로 인해 가장 밑바닥에서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다|스페인은 유럽의 아프리카]]" 따위 비하적인 담론과 이에 따른 방어적 마인드, 민감함 또한 극에 달했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후세의 종교인들, 사회운동 진영 사이에서는 [[해방신학]]의 선구자로 추앙받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